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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오늘의 기도·묵상

100917(금)-고통에 대하여 (성찬경 사도 요한 님)

두레골 2010. 9. 17. 08:1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기헌 바오로 사제여
 
이 글이 책에 실려 사제에게 도착할 때쯤이면 사순절 봉재의 시기가 끝나고
영광의 예수님 부활의 시기가 이미 시작 된 시기일 것이므로, 고통에 대해서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무엇인가 적는 것이 계절적 감각에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깔끔하게 이런 일 저런 일을 때에
맞춰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사제도 잘 알고 있겠지요.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사건과 표리를 이루는 일이며,
예수님의 사랑이 늘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듯이,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도 부활의
영광도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요. 그러니 너무 세월의 구분에 구애받을 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여기서 내가 평소에 생각해온 고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 합니다.

고통이 무엇인가? 고통은 우리 삶에 어떠한 뜻을 지니는가? 우선에 생각나는 것은
고통이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고통이야말로 좋은 것이다.
고통이야말로 가장 큰 은총에 속한다. 이렇게 말하려 하는 것인데, 이런 명제가
일반적으로 쉽게 납득이 되겠어요? 설명이 어렵지요.

큰 성인 십자가의 요한은 주님께 은총으로 고통을 주십사 하고 기도했다는데,
그렇게나 하니까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지요. 우리가 툭하면 잘되게 해 주십사
하고 비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고통의 범위는 넓습니다. 마음의 괴로움도 고통이요 육신의 아픔도 고통입니다.
불안, 절망, 의심, 시기, 질투, 불만, 분개, 공포, 무기력증 등 모두가 다 넓은
의미에서 고통입니다. 아픔, 가려움, 쑤심, 쓰라림, 피곤함, 답답함, 이런 것들은
모두가 신체적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들이 어찌하여 은총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세속적인 척도 가지고는 이 문제는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고통의 신비라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이런 정도 가지고도 벌써 알쏭달쏭한데, 고통이
은총이라니 보통의 논리적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납득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즉 체험을 통해서 그렇게 느끼고 깨닫는 길이지요.

그땐 참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가 좋았다, 이런 체험은 만약에 삶의 자세가
바르기만 하다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체험 아닐까요. 일이 잘 풀려 승승장구할 때,
지나고 보면 그런 때가 정말로 아슬아슬한 때였습니다. 십중팔구 벌써 마귀의 꾐에
넘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적 체험을 통해서 고통이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고통이 하느님 사람의 나타남이란 이 명제는 이를테면 수학에서의 공리같은 것일
것입니다. 증명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누구나가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고통은 역시 신비의 차원입니다.

고통을 일부러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그것은 부자연스러워서 좋을 리가 없습니다.),
차례온 고통을 잘 참아 받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통을 잘 삭인 사람은 생각이 깊어지고, 매사에 감사하게 되고, 남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관대해지고, 온유해지고, 오만에서 벗어나게 되고, 말수가 적어지고,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는 강인함을 얻게 되고,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되는 이런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수련이야말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오로지 각자의
체험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역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하나 우리 차례오는 고통을 마다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더 닮아보려고 힘쓰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둘도 없는 영광인데,
예수님이 엄청난 고통을 다 겪으셨으니, 이유 없이 예수님 따라서 고통을 겪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봐야, 우리가 겪는 고통이 아무리 지독하고 큰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의 몇 백 분의 일도 못 됩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수난을 미리 아시고,
'아버지, 되도록 제가 이 잔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드리며 피땀 흘리시는 예수님의 고뇌는 단적으로
말해서 인류가 겪어온 모든 고통의 총합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처절하고 암담한 장면은
없습니다. 실존적 절망의 극치를 그렸다고 하는 카프카의 어떠한 장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떠한 장면도 예수님의 심각한 고뇌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이르러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마취도 않고 손바닥과 발등에 큰 못 쾅쾅 박는 고통을 현대인이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신체적 고통을 겪는 데 있어서도 예수님의 모범은 완벽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고통을 달게 받으려면 하느님께 그야말로 절대귀의 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너에게 아픔을 주겠다' 하시면 '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답은 이것밖에 없고
'너에게 죽음을 주겠다' 하신다 해도 답은 역시 '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선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죽음조차도 좋은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쉽지만 이런 경지가 그리 쉽겠습니까.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겠지요.

사제여, 여기 어미 아비는 잠시도 사제의 안녕에 마음을 쓰지 않을 때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2008. 3. 5
아비 사도 요한 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1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