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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60203(수)-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어야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6. 2. 3. 06:43
2016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2사무 24,2.9-17

그 무렵 다윗 2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9 요압이 조사한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 유다에서 오십만 명이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이튿날 아침 다윗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에게 내렸다. 12 “다윗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서 일러라.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을 터이니, 그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13 가드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알렸다. “임금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을 뒤쫓는 적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 다니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 나라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 좋습니까? 저를 보내신 분께 무엇이라고 회답해야 할지, 지금 잘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가드에게 말하였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17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복음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지난 토요일, 제가 있는 성지에는 새 식구가 생겼습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라는 종인 두 마리의 개를 키우게 되었지요. 솔직히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강아지가 아니라서 걱정이 되었습니다(2살, 5살입니다). 주인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에 조금씩 적응하더군요. 특히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성지를 마구 뛰어다니니 무척이나 신나합니다. 목줄을 풀어주면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풀어줄 수는 없지요. 혹시라도 큰 몸집에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개집으로 데려옵니다.

처음에는 이 부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저한테 오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에 집중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해서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켜주니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그 중 한 마리는 저를 향해 곧바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다른 한 마리도 저를 향해 뛰어옵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하고 달려옵니다. 어쩌면 저를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를 통해 먹이를 얻을 수 있으며, 때로는 맛있는 간식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런 반응에 저의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 집니다. ‘드디어 내 목소리에도 반응을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특별 간식을 주기도 합니다.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신앙을 아직 접하지 않았을 때에는 주님의 부르심에 도저히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삶인지, 어떤 것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삶인지도 분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신앙을 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신앙은 접했지만 아직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의심하고 또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믿음 없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가 없었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덤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믿음도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내 맘 같지 않은 지금.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것은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산다는 게 내 맘처럼 되지만은 않는 것. 그렇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강세형).


성지 피정의 집 벽에 붙어 있는 성경 말씀.


하지 않은 말도 듣기

한 남자가 부부싸움 후에 신부님을 찾아갑니다.

“신부님, 저는 매일 아내와 싸웁니다. 이제 그만 싸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간청에 신부님께서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달 동안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한 달 뒤에 남자는 찾아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신부님 말대로 하니 정말로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또 다른 과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내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아내가 하지 않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보세요.”

말을 듣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하지 않은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을 강하고 굳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필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이러한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지 커피숍입니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