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행복한 쉼터, 두레골...

◐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0822(토)-낮은 자의 모습을...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5. 8. 22. 11:50
2015년 8월 22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제1독서 룻 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복음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생각납니다. 그는 입체파 화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를 않지요. 그래서 한 남자가 피카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사람들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습니까?”

이에 피카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남자는 자신의 지갑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내 피카소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보이지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진을 들여다본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청나게 작네요. 그리고 납작하고요. 그렇죠?”

피카소는 사진 속의 인물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지요. 납작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진으로 말입니다. 피카소가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일까요? 피카소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서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이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주관적인 인식을 배제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판단 역시 이러한 주관적인 인식을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시각을 사용할 수 있으며, 주님과 더욱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쌓여 있어서, 객관적인 인식만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이 아닌, 미움과 다툼이 만연한 삶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16년 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가졌던 마음들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사제단과 신자들이 바치는 성인호칭기도를 들으며 서품식장 바닥에 엎드렸을 때, 이 모습처럼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섬김의 삶보다는 심김을 받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과분하게 받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 자주 판단과 단죄를 반복했었습니다. 이 모습이 과거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고 꾸짖으셨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지요.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만 하고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 인사 받고 자신이 원하는 말만 듣기를 원하는 사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고, 어쩌면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지요.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 이 땅에 오셨고, 또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끝이 아니었지요. 부활의 영광을 통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증명해주셨습니다.

다시금 낮은 자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 봅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려는 그릇된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주님께 간절히 청해봅니다.

과녁에 꽂힌 화살의 개수는 쏜 화살보다 결코 많을 수 없다. 승리의 횟수는 도전의 횟수보다 결코 많을 수 없다(김은주).

 
우리들의 모후이신 성모님.


사랑의 실천을 위해

누군가 그럽니다.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이 정도는 봐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요즘에 인기 있는 드라마와 개그 프로그램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봤다는 영화는 꼭 보라고 합니다. 인기 드라마를 시간에 맞춰서 틀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10분 만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개그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역시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제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3년 국민독서 실태조사’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 독서율(1년 동안 정기 간행물, 만화, 잡지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1권이라도 읽은 사람 비율)은 71.4%였습니다. 매우 높은 것 같지요?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초라합니다. 글쎄 성인 1인당 연평균 독서시간은 9.2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1년 365일 동안에 책 읽는 시간이 9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답이겠지요.

영상매체에 익숙하다보니 활자화된 책을 읽기가 힘든 것이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영상매체가 아닌 활자화된 책에 익숙한가 봅니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보고 있으며,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의 책은 읽으니까 말입니다.

모든 취향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매체를 좋아하든, 활자화된 책을 좋아하든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지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을 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주관적인 취향일 뿐인 것으로 이를 당연하게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처럼만 보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그 모든 다름을 함께 하지 못할 이유로 찾고 있는 사회 안에서 과연 다양성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작은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은 과연 가능이나 할까요?

 
주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 지가 보여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