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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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40824(일)-폭력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4. 8. 24. 07:49
2014년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 22,19-23

주님께서 궁궐의 시종장 세브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나는 너를 네 자리에서 내쫓고,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리라.
2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나는 힐키야의 아들인 나의 종 엘야킴을 불러, 21 그에게 너의 관복을 입히고, 그에게 너의 띠를 매어 주며, 그의 손에 너의 권력을 넘겨주리라. 그러면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되리라.
22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23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제2독서 로마 11,33-36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마태 16,13-20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요즘에 군대폭력 문제가 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남습니다. 저도 군대를 다녀왔지만 제가 군생활 할 때에도 폭력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얼 차례 역시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억나는 두 명의 선임이 생각납니다. 한명은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본전 생각난다. 내가 너희만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폭력은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폭력을 휘두룹니다. 또 한 명의 선임은 "나는 절대로 후임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겠어."라면서 제대할 때까지 단 한 번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후임 병들은 어떤 모습을 닮을까요? 당연히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 선임을 닮아야 하는데, 대부분이 폭력을 썼던 선임을 닮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을 쓰는 선임을 무서워해서 더 말을 잘 듣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 폭력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을 갖게끔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신이 후임들에게 대접 받지 못함을 알아도 폭력을 쓰지 않았던 선임입니다. 폭력은 잠시의 효과를 누릴 수는 있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보다는 미움과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할 뿐입니다.

이 사회는 폭력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폭력은 단순히 누군가를 주먹을 써서 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 자지자신만을 드러내려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위에 오르려는 것,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또 다른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주님의 모습을 따르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시죠.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만을 보면서 세례자 요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의 한 명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예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몰랐기에,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고, 폭력의 삶이 아닌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저지르는 모든 폭력은 주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임을 잊지 않을 때, 내 삶의 기준도 오로지 주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지 않고 자란 아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겨울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르다.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지 않고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벤저민 프랭클린)..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

에릭 프롬이 말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하면 당신이 필요하니깐!'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니깐!'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늘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순서의 차이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도 그렇지요.

주님께 사랑한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나의 필요를 위해, 즉 내 이익만을 얻기 위한 고백은 아니었을까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에서 옮김 (13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