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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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오늘의 기도·묵상

111130(수)-딸기 머리핀 친구

두레골 2011. 11. 30. 07:20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변머리가 변변치 않은 탓에 나는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어느 때부터인가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날, 한가로운
가을녘을 떠올리며 매트 베르닝거의 "기다릴 수 없다네Think You Can Wait"
라는 음악을 들으며 청소기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저 건너편에는 내가 사제가 된 후 처음으로 세례를 준 로사리아의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왔다가 신부님 생각이 나서요... 뵌 지도 오래되었고...
시간 괜찮으신가요?" 나는 이 좋은 가을 날에 말도 못하는 진공청소기와 함께
지내다가 특사로 풀려난 죄수처럼 청소기를 던져 두고 좋아라 하며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로사리아는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가는 길에 명동에
들러 로사리아 아가씨를 위해 탐스러운 딸기 모양의 머리핀 두 개를 샀다.
직접 꽂아 주어야지....

자폐 증세를 보이는 로사리아는 이제 다섯 살이지만 간단한 자신의 의사표현도
엄마의 세심한 주의로 알아차려야만 그 의중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행동
발달이 늦다. 그만큼, 부모의 심정은 애가 탈 수밖에 없으리라.

마침, 그날 로사리아의 부모는 자폐 아동들의 승마치료를 위해 시 외곽에
위치한 종마장으로 향하고 있던 차였다. 생명력을 지닌 훌륭한 준마들이 발달이
늦은 아이들을 태우고 터벅터벅 푸른 초원을 거닐면서 좋은 기운들을 선사하는
승마치료가 이미 국내에도 도입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딸기 머리핀을 가슴에 품고 약속 장소에 나가 로사리아네 가족을 만났다.
지난 여름 내내 바깥에 나갈 기회가 없어서였는지 로사리아의 얼굴은 하얗지만,
그 내면에는 희미하게 퇴행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차에 올라,
우선 로사리아에게 인사하였다. 나를 기억할 리가 없겠지만, 낯선 아저씨가 무턱대고
자기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는 이유로 울음소리로 귓청이 떨어지도록 나를 맞아 들인
건 너무하다 싶었다. 좀 민망했다. 나는 너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어지간히 사태는 수습되고 우리는 곧 시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오래간만에
가을날의 눈부시도록 화려한 단풍의 세계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원경으로 지나가는 불붙는 듯 화려한 가을 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윽고
우리는 종마장에 도착하였다. 나는 안주머니에 감춰둔 딸기 핀을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리면서 기회를 보며 이 아가씨의 기분을 살폈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아이들이 종마장 정원의 푸른 초원을 뛰어 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깊은 숨이 쉬어졌다. 햐아....

어느새 푸른 초원 위로 유니폼을 잘 갖춰 입은 승마 선생님들이 나와서
간단한 인사와 더불어 승마 교육을 도왔다. 그리고 곧바로 차레차례 아이들과
잘생긴 말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경이로움이라고 밖에 달리 마땅한
표현이 떠오를 길이 없는 이 커다란 말들 앞에 있으려니 앞으로 펼쳐질 광경들이
몹시 기대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주늑이 들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주눅이 든 것은 나뿐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말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훌륭한 창조물을
다 만드실 생각을 하셨던 것일까. 나는 크고 투명한 말들의 눈동자 앞에서
왠지 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작은 눈에 힘을 주며 있는 힘껏
눈을 크게 떠보려 애쓰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도 이 경이로운 피조물 앞에서
어떤 신비감을 경험한 것 같다. 거대한 말이 숨을 내쉴 때마다 강인한 생명력이
나에게 전달되어 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로사리아 차례가 되었다. 말 위에 오른 로사리아는 처음에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시야의 차이(그 아이는 늘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아마도
그날 처음으로 높은 시선의 위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경험한 시야의 차이를
경이롭게 받아들인 것 같다) 때문인지 약간 긴장한 시선으로 줄곧 엄마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능숙한 승마 선생님의 안내로 말이 서서히 움직이자 얼었던 눈이 스르르
녹듯 긴장으로 굳은 얼굴에 이내 함박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로사리아를 태운
말이 목장 주변의 푸른 초원을 거닐게 되자, 나는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의 시선으로 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쩌면 저 말과 같다는 다소 황당하고 경솔하기까지 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힘겨운 한 삶을 등에 업고 얼래고 달래며 저 강인한 생명력의 근원은 좀처럼 말이
없이 푸른 초원을 거닐 뿐 힘들다거나 혹은 그만 내려 달라는 가차없는 요구를
포기한 채 그저 생명을 나눌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장 주변을 도는 수십 마리 말들의 느린 걸음걸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하는 어떤 생명력의 근원에 가 닿아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한한 감사함이 마음속 깊이 올라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나의 의식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용기를 내어 말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윽고, 한 차례의 승마치료가 끝난 뒤, 말들은 아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풀을 뜯게 되었다. 나는 이 틈을 타서 말들에게 다가가 보기로
했다. 여러 준마들 곁으로 살며시 다가간 나는 내친 김에 손을 말들 머리 위에
얹어서 그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도 아이들을 등에 업고 목장 주변을
수 바퀴씩 돌았던 것이 고되었던가 보다. 말들은 지쳐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새어져 나오자 마른 풀이 그들의 숨결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말을 한번 안아 보고 싶어졌다. 얼굴을 맞대고 내 얼굴의 세 배는 족히 될 것
같은 그 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간을 도우러 오신 그분의
노고가 감히 기억되어서일까. 나는 두려움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사리아
아가씨가 탄 준마를 온몸으로 안았다. 그러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친 말은
그냥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 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사제직의 모습은 이 지친 말들이 보이고
있는 시간처럼 나의 모든 것을 가난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내어 주고,
그저 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주인의 잔칫상에 가장 말미에 앉아서 조용히 주인의
거동만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겸손한 종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승마치료가 끝나고 우리는 푸른 풀밭에 앉아서 로사리아의 엄마가 마련한
김밥을 점심으로 나누어 먹었다. 반나절을 함께한 탓인지 이제 줄곧 로사리아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내가 이제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안주머니에 줄곧 감춰 두었던 딸기 모양의 머리핀을
꺼내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짧은 내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 꽂힌 머리핀과 똑같은 딸기 머리핀을
하나 더 꺼내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로사리아의 예쁜 머리에 꽂았다. 이제
우리 둘은 똑같은 딸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너무나 좋아했다.
엄마가 가져온 작은 손거울로 자신의 머리핀과 내 머리에 우스꽝스럽게
꽂혀 있는 머리핀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마침내 까르르 웃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는 로사리아를 내 등에 업었다. 이제는 내가 말이 된 것이다.
우리는 같은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가을녘으로 계절이 바뀌어 가는 목장 주변을
거닐었다. 주변의 산들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겨울을 채비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여전히 지친 말들이 이따금씩 긴 꼬리들을 휘감으며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내 등 위에서 쌔근쌔근 따스한 입김을
내며 로사리아는 잠들어 있었다.

-김상용 신부님(예수회)/생활성서 12월호-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11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