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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난 몇 년 동안 상실의 고통으로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상실이란 단지 환상에 불과해서 실제로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상실은 없어요. 다만 그것을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지요." 그러나 나는 의아해졌다. 개인이 해탈의 경지에 올랐을 때 그 말은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상실이라는 체험 없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삶의 범주에서 보면 상실은 분명히 있다. 상실의 고통을 영성화하여 떨쳐버리려고만 한다면 성장하는 데 그것을 잘 사용할 수가 없다. 램 다스의 말대로 인생이 궁극적인 영적 스승이라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서는 영적인 것을 배울 수가 없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은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희로애락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배운다. 체험 없는 삶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영적인 길을 배우는 데 체험만 한 것이 없다. 상실의 체험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는 없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상실의 느낌을 피하는 것뿐이다. 내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힘든 항암 치료를 끝낸 지 2주 만에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집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는 일을 겪었다. 옷가지는 물론이고 편지 한 통, 아이들과 부모의 사진 한 장, 결혼 기념품 하나 건지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녀가 아파할 것을 생각하니 참담했다. 그 후 그녀가 사무실로 찾아 왔을 때 나는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고 위로하며 나도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힘껏 끌어안은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저는 그 집 부엌을 아주 싫어했어요." 상실의 느낌에서 우리를 보호하려고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어 기제들이 실제로는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부인하거나 합리화하거나 회피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여러 가지 방법은 잠시 동안 상실의 고통을 잊게 할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더 큰 상처를 만든다. 그 같은 모든 방어기제들에는 두 인생이나 인생의 과정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방어기제들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지혜를 찾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다. 고통은 자신을 알게 해주며,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깊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이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깊이 슬퍼하고 어떻게 상실의 고통을 치유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삶의 고통에 충분히 동참하려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생의 심오한 차원에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삶의 고통에 동참하고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 슬퍼하고 아파할 수 없다면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고통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일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를 수 밖에 없으니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누구와 친밀해지거나 돌보거나 돌봄을 받는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 아무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깊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여러 기술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기술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상실의 고통에서 치유되어 다시 삶을 사랑하고 지혜를 키울 수 있는 길이다. - 할아버지의 축복/레이미 나오미 레멘/문예출판사 -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11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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