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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60120(수)-주님이라는 내비게이션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6. 1. 20. 10:55
2016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사무 17,32-33.37.40-51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복음 마르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저는 운전을 2000년부터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차 안에 지도 하나씩은 모두 가지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었기에,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에는 지도를 보면서 가야할 경로를 미리 살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본 뒤에 다시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길을 찾기 위해서 굳이 길가에 차를 세워둘 필요가 없습니다. 목적지만 정확하게 입력만 해 놓으면 교통 상황까지 고려해서 가장 최적화된 길을 찾아주고, 만약에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서면 내비게이션은 스스로 알아서 다시 경로를 찾아주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대에는 어떻게 운전을 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편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목표를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그리고 틀린 경로로 가면 다시 재설정해서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내비게이션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이라는 내비게이션이 계셔서, 우리의 최종목표를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죄로 인해 잘못된 경로로 가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해주십니다.

문제는 그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알리면서 재설정을 해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길이 무조건 맞다며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안내를 무시하면서 자기가 생각한 길로 가는 사람에게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하나의 소음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은 삶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인 것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지만 보고 있지요.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이지만, 그들은 고통 받는 사람의 치유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서 제거하려고만 합니다. 주님이라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내를 절대로 따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여요. 상대의 마음도 보이고요, 이웃의 아픔도 보이고요. 그냥 보아서 보는 것은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보이는 것, 사랑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랍니다(최복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사람 사이에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관계가 맺어질 때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만남과 진정한 관계가 계속 확장되어 갈 때 공동체의 크기는 점점 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공동체의 크기를 크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크기를 줄이는 역할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이웃을 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만나는 이웃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품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르틴 부버는 이런 말을 했지요.

“하느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하는 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느님께만 드리는 말씀은 그릇된 것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늘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나의 이웃도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임명장이 우편으로 왔네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