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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1112(목)-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5. 11. 12. 09:19
2015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지혜 7,22ㄴㅡ8,1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9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복음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어느 조그마한 강아지가 있었는데, 힘이 없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하게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힘 있는 호랑이가 너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기르려고 해도 되지 않으니, 계속해서 좌절에 빠졌지요. 어떻습니까? 과연 이 강아지는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의 중요성을 주장한 정신의학자인 프리츠 펄스는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는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또 인간이든 본능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목표는 자신의 본질과 일치하도록 자아를 실제의 모습으로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강아지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과 실제 자아의 모습에 차이를 갖게 될 때 괴로워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성적이기는 했지만, 제가 원하는 성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점점 더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습니다. 나중에는 등수가 오르지 않는 이유를 저보다 더 공부 잘하는 친구 때문이라고 생각되면서 미움의 감정도 가졌습니다. 저 역시 ‘내가 아닌 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었던 것이지요. 바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대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집중하다보니 생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괴로움과 시련은 대부분 이 세상의 것에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고 하는데,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맞춰서만 살아가려고 하니까 갈등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 안에서 과거와 미래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지요. 현재에 집중할 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나’에 집중하다보면 분명히 주님께 집중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어쩌면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큰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자기들이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를 원했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왜냐하면 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우리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분들이 종종 “언제 좋은 날이 올까?”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그 좋은 날은 이미 와 있습니다. 아직 안 왔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와 있는 좋은 날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좋은 날이 왔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가장 좋은 날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말이지요.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린 홀).


울산 간절곳에서 바라본 바다.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야!

종종 사람들은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한 방으로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복권을 많이 구입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방으로 1등에 당첨되면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요?

복권에 당첨만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행복감이나 소소한 일상의 삶 안에서 얻는 행복감이나 차이가 없다고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는 발표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뇌에 ‘적응’이라는 기전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강도의 행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제로 상태로 다시 돌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식사를 하고서 그 행복감이 평생 간다면 어떨까요? 굳이 다시 식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존에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뇌에서 행복감을 리셋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한 방이 아닙니다. 로또 복권 1등 당첨과 매우 배고플 때의 한 끼 식사나 곧바로 잊힐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 행복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큰 한 방처럼 보이는 기쁨보다는 일상 삶 안에서 소소하게 얻을 수 있는 계속된 작은 기쁨들이 계속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행복해 질 수 있는 길, 아직도 큰 한 방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계속 주어지는 작은 기쁨들을 원하십니까?


사람들의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