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행복한 쉼터, 두레골...

◐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0418(토)-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5. 4. 18. 07:09
2015년 4월 18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복음 요한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이번 달 초에 있었던 성유축성미사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이 날은 교구 내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의 충성서약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신부들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더군다나 성목요일은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셨기에, ‘사제의 날’이라면서 많은 신자들이 축하해주기 위해 미사에 오십니다. 미사가 끝나고 퇴장을 하는데 역시나 많은 신자들이 오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신부님!”이라는 큰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때 재미있는 일이 생겼지요. 글쎄 저를 포함해서 함께 있었던 신부들이 모두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 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부르는데,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철수 아빠!”라고 불렀다면 저는 절대로 그 소리를 쫓아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주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제대로 불러야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엉뚱한 곳에 시선을 맞추고 다른 이름을 부른다면 주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의 모습을 취하곤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주님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혹시 주님을 간절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명예 등을 더 간절히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녁이 되어 어두워졌을 때 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도 높게 일고 있은 상황이었지요. 이 상황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음을 나타내는 성서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다보니, 어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직접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려움과 힘든 상태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원하던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원하는 것들을 주님의 도움으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제대로 또 간절하게 부르고 있었을까요? 돈, 명예, 힘만을 부르면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내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자신의 기도를 다시금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어디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제주 새미동산의 물 위를 걷는 예수님.


당신의 손에 할 일이 있기에(켈트 족 기도문)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의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신이 늘 당신 곁에 있기를...

엄청난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지금 내가 바치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기도가 아니라 순간의 만족을 위한 기도는 아니었을까요?


봄입니다. 거리의 벚꽃이 참 예뻐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