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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41119(수)-적극적으로 일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4. 11. 19. 09:51
2014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묵시 4,1-11

나 요한이 1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4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5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6 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7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8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9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10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복음 루카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어떤 기업에서 서울 1호선 전철 안에 예쁘게 포장된 선물과 꽃다발이 든 종이가방 100개를 놓아둔 뒤에 몰래카메라를 찍었습니다. 즉, 이 종이가방이 몇 개나 다시 회수되는지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정직함을 알아보자는 것이었지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몰래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이 종이가방에 큰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 종이가방을 들고 전철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모습이 계속 영상에 찍혔습니다.

결국 하루 동안 100개 중에서 94개의 종이가방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불과 6개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정직함이 겨우 이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날 전철의 유실물 센터에 자그마치 81개가 접수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조금의 이득만을 주는 순간의 만족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정직한 삶을 포기할 때 사실은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습니다. 문제는 순간의 만족을 더욱 더 크게 생각하다보니 후회할 일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을 따르는 삶 안에서도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괜히 손해 보는 것 같고,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삶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하늘의 커다란 보화를 쌓게 되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통해서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을 나눠주지요. 종들은 이 한 미나를 통해 열 개를 또 다섯 개를 벌어 옵니다. 하지만 한 명의 종은 이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한 뒤에 나중에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그렇다면 종의 임무는 무엇일까요? 주인이 준 돈을 통해 사업을 해서 주인의 곳간을 채워 들이는 역할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벌어들인 미나를 자신의 곳간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되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인의 삶에 동참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만이 중요한 것이었지요.

미나를 받아 사업을 벌인 종들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과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주님께 충실한, 즉 주님께 정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미나를 통해 열 개, 다섯 개로 벌어들인 종이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았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내가 얻게 될 은총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큽니다.

남에게 선행을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시킨다(조로 아스터).



안일한 마음 몰아내기.

어떤 할아버지가 감독하는 가운데, 한 젊은이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험할 만큼 높이 올라가 있을 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을 다 끝내서 거의 내려왔을 때 “잘못 디디지 말고, 주의해서 내려오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위험한 높이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가, 그냥 뛰어내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높이에 이르러서야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웃으며 물었지요. 그러자 이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휘청거리고 눈앞에 아찔할 때는 누구나 스스로 조심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 실수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 때 일어나기 마련이거든.”

이 이야기가 크게 와 닿습니다. 아마 운전하시는 분들은 이런 경험들을 한 두 번은 하셨지 않을까 싶네요. 초보 운전 때에는 사고가 잘 나지 않습니다. 운전이 미숙하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로 사고가 날 때는 언제라고 해요? 이제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길 때입니다.

안일한 마음이 사고도 불러일으키는 법이지요. 신앙인들도 이렇게 안일한 마음을 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어느 정도의 신앙심을 갖추었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이때는 사랑보다는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더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주님께서 좋아하실 모습은, 안일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당신께 항상 충실한 모습. 사랑의 실천에 너그러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