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복음 마태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 글짓기 숙제를 내 주신 선생님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글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제일 힘든 숙제가 바로 글짓기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200자 원고지 10장 이상’이라는 단서가 붙으면 더욱 더 힘들어집니다. 글의 내용보다도 원고지 10장을 채운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했다’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을 ‘~했었던 것이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길게 늘어서 표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간신히 원고지 10장 이상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쓴 글을 가지고서 선생님께 칭찬 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실 힘 있는 글은 아주 간단합니다. 길게 풀어 쓴 글이 아니라 또한 페이지만 채우기 위한 글이 아니라, 문장에 불필요한 단어가 없어야 힘이 있는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짧은 글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자주 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오랜 시간동안 성당에 앉아만 있다고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그 오랜 시간동안 딴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짧은 기도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기도, 자신의 온 마음이 담긴 기도를 주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이런 기도의 모범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런데 ‘과연 감사할 일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고, 오히려 철부지 같은 사람들만 예수님의 제자로 들어오고 있음을 감사하다고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어쩌면 불평불만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감사’의 길임을 잘 아시기에, 또한 늘 좋은 것만을 주심을 아시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기도 대신 끊임없이 청원기도만을 바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잘 모르는데 바치는 청원기도는 의미가 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게 무엇을 좀 해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탁을 들어주겠습니까?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안면이 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제가 원하는 대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제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만 행동하는데, 이런 사람이 제게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들어주겠습니까?
하느님을 잘 아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청원기도도 또 감사기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바칠 수가 있습니다.
행복은 숨바꼭질이다.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윤초).
용서(김경원, ‘좋은 기분을 만드는 작은 행동들’ 중에서)
용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용서는 미움, 분노, 원한 같은 부정적인 감정 대신 동정, 공감, 이타, 사랑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 연구 팀이 용서하지 않고 증오하는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혈압과 심장 박동수를 관찰했더니,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균치보다 훨씬 높았다. 의학자들은 “미워하는 마음이 근육을 긴장하게 만들고 감정 조절 능력마저 떨어뜨려 근골격계, 신경계와 면역계, 내분비계에도 악영향을 준다.”라고 주장한다.
미국 호프대 연구 팀은 타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상으로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은 감정 상태로 16초간 있게 하고, 이어 상대방을 용서한 감정 상태로 16초간 있게 하면서 심장 박동수와 혈압을 측정했다. 그 결과 용서하지 못한 감정일 때는 심장 박동수와 혈압이 올라갔지만 용서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는 심장 박동수와 혈압이 떨어졌다.
1999년 유고슬라비아에서 78일간 벌어졌던 코소보 전쟁에서 미군 세 명이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 이중 한 명인 크리스토퍼 소토운은 감옥에서 석방됐을 때 자기를 가둬 놓았던 보초를 위해 용서하고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고 떠나겠다고 고집했다. 기어이 보초를 만나 기도해 주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함께 포로 생활을 했던 다른 두 사람보다 더 빨리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한 것이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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