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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40711(금)-사랑 가득한 주님의 뜻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4. 7. 11. 05:37
2014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호세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복음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강의를 다니다보면 청중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과연 하고 있는 이 강의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 또 그렇지 않은지를 청중들의 얼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항상 강의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강의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을 자주 더듬는 것입니다. 또 강의록 내용이 강의 도중에 생각나지 않아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었지요. 그런 와중에 강의가 잘 되지 않고 있음을 한 형제님의 얼굴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팔짱을 낀 채 딱딱한 자세로 앉아서는 제가 어떤 농담을 해도 웃지 않았고 이해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단 한 번도 끄덕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입으로는 계속해서 강의를 하면서도 머리로는 속이 뒤집어질 만큼 괴로웠지요.

강의를 모두 끝내고 성당의 뒤편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 제게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두려워졌습니다. 제게 다가와서 강의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쏟아 부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제게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신부님 말씀이 제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어요. 멋진 강의였습니다.”

이 형제님 얼굴을 보고서 실패한 강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틀렸다고 또 실패했다는 생각은 바로 저만의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걸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지례짐작으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췄을 때,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이고 나약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 한 가지가 발견됩니다.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거나 저항하라고 가르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즉 어떤 부당한 대우와 남들이 가하는 벌을 당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만 하십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고 때로는 나의 반대자를 과감하게 물리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나만의 생각, 세상의 생각에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 가득한 주님의 뜻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머물고 있었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마음들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법정).



주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 사이에서 나의 선택은?

게티 오일의 창립자이자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인 J.폴 게티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충분히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 때는 언제입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것을 욕구를 버리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요? 어쩌면 세상의 법칙 테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 한 가지만 보죠. 텔레비전 방송 광고를 생각해보세요. 광고에서는 끊임없이 세상의 법칙을 우리들에게 주입시킵니다.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물건을 구입하지 못하면 비참한 상황에 빠질 듯이, 또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세상의 법칙을 꼭 따른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영원함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법칙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4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