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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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40612(목)-사랑이 가득 담겨진 말과 행동으로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4. 6. 12. 08:16
2014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열왕 18,41-46

그 무렵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43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45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즈르엘로 갔다. 46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


복음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저의 하루 일과를 보면 우선 새벽 5시쯤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바친 뒤에는 사제관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치고 영적독서와 성체조배를 하지요. 이렇게 거의 2시간 이상을 아침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미사와 낮기도, 저녁기도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 중에 3시간 이상을 주님 안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이 정도면 그래도 주님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하루 24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중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아니더군요. 또 주님께 머무르는 시간을 어떻게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루 24시간 온전히 주님 안에 머물러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냥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착각과 교만에서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말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착각과 교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서 갑자기 숨이 확 막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항들을 더 확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만 잘 지키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계명을 확대해서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사람은 엄청난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당시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철저하게 613개나 되는 율법 세부조항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열심히 지키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안일하고 교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위가 잦았던 것입니다. 이 기준 때문에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뛰어넘으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형제에게 화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세세한 조항의 이행보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세부조항을 만들어 지킨다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이 가득 담겨진 말과 행동으로 언제나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이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장애라 할지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한, 의지의 장애는 아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영혼을 맑게, 신체를 쾌적하게 유지하자(H. 하이네).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작년에 등산을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이었지만, 신학생 때 산악반을 하면서 꽤 많은 산을 다녔고 또한 평소에도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산 중턱까지 올랐을 때, 정말로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 나오는지 막막하기만 했고, 매고 있던 배낭도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던 지요. 그러면서 산을 우습게 봤다는 반성, 또한 왜 등산을 왔는가 라는 후회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 정상에 올라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가졌던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 힘듦이 모두 사라집니다. 대신 정상에 올라가니 그다음 목표가 생기더군요. ‘다음에는 더 높은 산을 오르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목표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표에 이른 뒤에 또 다른 더 높은 목표를 잡아서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을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