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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오늘의 기도·묵상

091121(토)-40도 안된 나이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두레골 2009. 11.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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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토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 루카 20,27-40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루카 20,27-40)


<40도 안된 나이에...>



   작년 여름, 안타깝게도 40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한 형제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병실을 방문할 때마다 매번 느꼈던 안타까움은 그분의 생명이 눈에 확 띄게 시시각각으로 여위어지는 것을 확인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암세포의 전이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세는 참으로 의연했습니다. 그분은 묵주와 성서가 언제나 머리맡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그분이 특별히 가까이 했던 성서구절이 있었는데, 시편 23장이었습니다. 자주 암송했기에 나중에는 성서를 펴지 않고서도 다 외울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드디어 시편 23장을 다 외웠다고 자랑하시던 모습, 그리고 보란 듯이 제 앞에서 시편 23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외우시던 모습은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먼저 떠나보내기가 너무도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가족들을 오히려 조용히 위로하고 격려하던 그분의 모습은 제게 참으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고통 가운데서도 평온했던 그분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참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닫습니다.

   물론 그분은 오래가지 않아 극심한 고통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내려놓고,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을 향해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게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떠나신 지,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벌써 일 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분의 고통가운데서도 평화로웠던 얼굴, 가족들을 위로했던 그분의 따뜻한 음성, 편안하고 소탈했던 그분의 분위기는 제게서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신앙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그래! 어쩌면 부활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 누군가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가고 없지만,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삶의 향기가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부활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이웃을 위해 크게 한번 희생할 때, 참기 힘든 상황 앞에서 크게 한번 인내할 때, 한번 선행을 베풀 때, 한번 양보할 때,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인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 부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매일 이 세상에서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잠시 지나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나약한 육신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이 세상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는 결코 예쁜 계란 바구니를 주고받는다든지 알렐루야를 크게 외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각자 안에 부활하시기 위해서 몸소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한 번 더 용서하고, 한 번 더 희생하고, 조금만 더 인내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인 "작은 부활"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매일 아침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어 이웃에게 용기 있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그 순간 우리는 참으로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굿뉴스 가톨릭게시판 우리들의 묵상'에서 옮김 (09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