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언젠가부터 저의 비교 상대가 사람에서 하느님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이 부지런하면 저도 부지런하고 싶고, 하느님이 겸손하면 저도 겸손하고
싶고 하느님이 한결같으면 저도 한결같고 싶어집니다. 하여 새롭게 태양을 떠올려
새날을 여는 하느님처럼 저도 매일 준비된 강론과 정성어린 미사를 쏘아 올려
새날을 엽니다. 하느님께서 계속 부지런히 일하시는데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봄비가 내린 아침 수도원을 산책하던 중 상쾌한 느낌 속에 깨달음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매일이 새 아침 새날이구나. 하느님은
늘 처음처럼 하루처럼 영원한 청춘을 사시는구나.' 하여 저도 하느님처럼 매일
새 아침, 새날을, 처음처럼 또 평생을 하루처럼, 영원한 청춘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하느님처럼 매일 새 아침, 새날을,
처음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영원한 청춘을 살 수 있을까요? 나름대로 찾은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끊임없이 기도해보십시오.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 마음이 새롭게 되면 늘 새날 새 아침입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다행히도 저는 내심 만족스런
답을 찾았습니다. "살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살기 위하여' 이젠 이 말이 저의
단골 애용어가 됐습니다. 살기 위하여 밥 먹고 숨 쉬어야 하듯, 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러면 삶의 의미도 생활의
중심도 뚜렷해져 영혼이 살고 이어 육신도 삽니다. 그러니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특별한 기도가 아니라 교회가 권하는 평범하나 참으로 중요한
기본적인 기도입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또 권하고 싶은 기본적인 기도는
미사와 시편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입니다. 만약 누가 저에게 세 권의
책을 택하라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미사통상문, 성무일도서, 성경 이렇게
셋을 택할 것입니다. 음식으로 하면 주식과도 같은 이 세 기도에 충실하면 그것
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루를 떠 받쳐주는 영적 기둥과 같은
이 기도들만 충실히 하면 이외 간식과 같은 신심기도나 묵상기도는 좀 덜 해도
별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늘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당장 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시편을 읽든 노래하든 소리내어 바치고
성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읽어보십시오. 좋다고 소문난 이런저런 기도만
쫓아다니지 말고 이 세 가지 기도만 충실히 해도 영성생활의 탄탄한 토대가 마련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나 매일 미사나 시편기도 때,
'아버지'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란 호칭을 부를 때는 진심을 담아 앞에서
계신 주님과 대화하듯이 기도하는지요. 이렇게 기본적인 기도들에 충실할 때
저절로 성경 말씀이 내 안에 육화되어 나의 영성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수도원을 방문한 어떤 이와 주고
받은 문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부님, 이 수도원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무슨 기쁨, 무슨 재미,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역시 이런 질문에 대한
저의 즉각적인 단골 대답이 있습니다. "하느님 찬미하는 기쁨으로, 재미로,
맛으로 살아갑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기도를 잘하는 방법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도 잘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찬미하게 되고
감사기도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반면 하느님께 대한 청원은 점점 적어집니다.
받은 은총이 차고 넘치는데 새삼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하느님 찬미하는 기쁨과 그 맛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수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로 시편을 즐겨 노래합니다. 시편을 노래로
바치면 읽는 것보다 두 배의 기도 효과가 있다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비단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라면 혼자든 함께든 시편 성가를
찬미기도로 바쳐보면 밋밋한 영성생활에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찬미의 종교요 믿는 이들은 찬미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사와 성무일도의 시편도 대부분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양 날개와도 같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내 중심적인
삶' 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시켜 긍정적이고 낙관적 삶을, 무욕(無慾)의
자비롭고 순결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줍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안에서 저절로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어 내적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그래서' 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부정적 비판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변모시켜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기도생활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니 불평불만으로 내려앉는 마음을
찬미와 감사로 부단히 들어올려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세 번째, 혼자보다는 함께 기도하십시오. 아마도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산다고 해서 공동체는 아닙니다.
일치를 이루는 중심이 있을 때 공동체입니다. 마음이 맞아서, 인간적으로 서로
좋아서 쉽게 이뤄진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으로써
생기는 일치입니다. 가정공동체든 교회공동체든 사회공동체든 일치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기주의가 팽배한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시대에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함께 기도를 바치는 일은 공동체 건설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여 저는 일주일에 단 한 번이라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 공동기도를 바칠 것을
권합니다. 또 뜻이 맞는 이들의 기도모임을 적극적으로 권하며,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시편을 읽든지 노래하든지 함께 기도하길 권합니다.
끝으로 평생,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하시길 권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지체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감정에 따라, 기분에 따라 기도하지 말고 좋든 싫든 기쁘든 슬프든 의지적으로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기도생활의 기본 원리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요령이나 지름길도 없고 도약이나 비약도 없습니다.
기도는 이론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이요 실천이요 수행입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고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도생활에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나무가 며칠 사이에 부쩍 자라는 게 아니라
꾸준히 보이지 않게 자라듯 기도생활의 성장도 그러합니다. 꽃이 폈다 하여
당장 열매를 기대할 수 없고 열매가 익어가는 때를 기다려야 하듯 기도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열매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쉬지 않고 꾸준히 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항구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니 가까이 있고 보배로운 기도인 미사와 시편기도, 그리고 성독에 충실해
보길 바랍니다. 청원기도보다는 찬미와 감사기도를, 혼자보다는 함께 기도를
매일, 꾸준히, 규칙적으로 밥 먹듯이 숨 쉬듯이 기도해 마침내 기도가 천성적인
습관이 되도록 해보십시오. 기도생활에 항구하다 보면 언젠가 내 '기도의 강'은
'하느님 바다'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하늘에 닿은 아름드리 거목의
기도 나무가 된 내 모습에 놀랄 날이 올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님(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원장)/생활성서 6월 호 -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09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