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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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오늘의 기도·묵상

090526(화)-가난 부인 (성 프란치스코)

두레골 2009. 5. 26. 08:00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은 제가 나환자들을 만남으로써 그것(가난의 신비)을 알아듣게 하셨지요.
나환자들이 저에게 얼마나 끔찍하던지.
그건 어쩌면 나환자를 죄의 모습 자체로 여기던 교회의 해묵은 버릇 탓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은 강제로 격리되었고, 우리 부모들도 병이 옮길까봐 겁을 냈고,
저 자신 또한 나환자의 몰골을 차마 쳐다볼 수도 없었거니와
온 세상의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나환자를 만질 엄두는 못 냈지요.

그런 환자를 혹 만날 수도 있다는 상상마저 얼른 뿌리쳐 버리는 저였으니까요.
그런데 만났어요.
가던 골목이 어찌나 좁던지 서로 스치고 지나가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했는데....
도망칠 생각이 불쑥 났는데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고상이 떠오르면서 앞을 막더군요.
꼼짝없이 골목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지요.

누더기를 걸친 나환자는 느릿느릿 앞으로 다가오고.
그는 헝겊으로 싸맨 손을 내밀면서 아픔이 서린 온유하고 겸손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그 순간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이 떠올랐는데 바로 그와 똑같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지를 않겠어요.

무슨 일이 제게 일어났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앞으로 껑충 뛰어나가 나환자를 껴안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춘 거에요, 제가.
나환자는 울음을 터뜨렸고 저도 그와 함께 울었어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어요.
그러나 그건 제가 그에게서 받은 것에 비하면, 그가 입맞춤으로 제게 준
깨달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순간 제가 영원토록 아내로 맞으려던 그녀, '가난 부인' 의 빛나는
옷자락을 만졌던 겁니다. 그 나환자의 눈에서 저는 말씀의 강생 신비를 엿보았어요.
이제 제 배우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사랑하시는 존재,
곧 가난한이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느꼈어요.

나환자에게서 알아본 '가난 부인'은 이 세상 전체의 가난 그것이었고
모든 작고 힘없고 고생하는 것과의 연대였으며 하느님 자비의 가장 소중한 접점이었어요.

가난 부인!
그녀의 더없이 겸허한 얼굴은 제가 만난 모든 가난한이의 얼굴이었어요.
그녀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진주였으며 그것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만
제시되는 신비 가득한 눈이었어요.
그녀의 향기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향기여서, 편하고 쉬운 것들의 향락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정신의 영웅들의 향연으로 부르는 향기였어요.
그때까지 저는 가난이란 이 땅의 저주로, 창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하느님의 어떤 저버림으로, 사람들이 고통받으라고 마구 안기는 말 못할
혼란인 줄로만 여겼었는데.

이제는 그 너머로 보았어요.
가난에 저주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 부유와
권세와 허욕에 저주가 들어 있어 독이 된다는 것을.
가난이란 창조의 한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 신비를 만나게 하며 하느님을 찾아 나서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내놓게 하는, 어쩌면 창조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이라는 것을.

가난이란 하느님이 그대를 저버리신 게 아니라 그대의 저 깊이에서 거저 베푸는
사랑과 벌거벗은 사랑을 캐내시는 참다운, 쓰라린 방법이라는 것을.
가난이란 사람들을 옭아매어 울리고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하는 혼란이 아니라
그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것을

그 순간부터 저는 더 이상 의심이 없어졌어요. 가난이란 어디보다도 하느님의 손길이 와 닿는 곳,
참다운 사랑의 가장 좋은 배움터, 자비를 불러들이는 가장 강력한 매력, 하느님과의 스스럼없는 만남,
이 땅을 건너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었어요. 그래서 가난 부인과 열정의 혼약을 맺었어요.
그때부터는 제 안에 어떤 두려움도 없어지더군요. 아니, 그것은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었어요.

- 프란치스꼬 저는/ 까를로 까렛도(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09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