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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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0705(일)-다름의 아름다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5. 7. 5. 07:38
2015년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제1독서 2역대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제2독서 로마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지난 번 이태리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광경이 하나 있습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다가 각자의 자리 앞에 있는 모니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니터를 통해서 사람들은 영화나 방송 그리고 기타 정보들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있는 화면들이 모두 다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음악이나 뉴스를 듣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화면들이 조화를 우리는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만약 다 똑같은 화면이라면 어떤 통일성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 멋져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느낌을 어떤 신부님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한 거 아냐?”라고 말씀하시네요. 맞습니다. 다양한 모습들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인데 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왜 그리 많을까요?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이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고 합니다. 또 신부님은 십자가라고 하고, 교통경찰은 사거리라고 하고, 간호사는 적십자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답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답이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인 것이지요.

산의 모습이 모두 똑같다면 아마 사람들은 등산을 즐기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산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산, 저 산을 쫓아서 등산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다름에 감사할 수 있고, 또 그 다름을 멋있다고 칭찬해 주면 안 될까요? 항상 우리를 지지해주시는 주님처럼 말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로 너무나 젊은 나이에 순교를 하시게 되지요. 박해를 가했던 당시의 집권자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 틀림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끔찍한 박해를 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의 큰 착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모습은 계속 되는 것 같습니다. 나와의 틀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박해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다름의 아름다움을 인정해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세상은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간이 될 것입니다.

삶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순 없지만, 옆에 있어 줄 순 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두고 본다면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이주향)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참 잘했어요.

초등학생 때, 숙제나 일기 등을 제출하면 선생님께서는 이를 보시고는 맨 뒤에 ‘참 잘했어요.’, 또는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잘 한 것인 줄 알고 다른 친구들과 비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 역시 이 둘 외의 도장은 찍혀 있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저와 친구들은 숙제를 했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지, 다른 친구들과 내 점수를 비교하는 등의 행동이 굳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긴 성적표에도 단순히 ‘수우미양가’라고 표시될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때는 비교가 필요 없었고, 그래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숫자화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 성적도 숫자로 표시되었고 몇 등을 했는가가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언젠가 어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이 “ 내 점수는요~~ ”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사람마다 노래가 와 닿는 정도가 분명히 다를 텐데, 보편적인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단 3명으로부터의 평가가 정답인 듯이 되어 버리는 모습에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 그 뒤로 보지 않게 되었지요.

세상이 점수에 의해 규정되면서 비교의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역시 때로는 홈페이지 방문자 수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다른 곳과 비교하기도 하더군요.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인데 말입니다.

숫자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주관적인 판단도 중요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라고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비교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살 수 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



참 잘했어요. 도장입니다.

-'빠다킹 신부아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