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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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0103(토)-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간직해야 -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5. 1. 3. 06:55
2015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 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복음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어떤 분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고 합니다.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지요. 상대방 친구는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하려 했고, 둘은 오랫동안 꽉 안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의 강력한 포옹에 느낌이 이상하더랍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몸이 감기 걸린 것처럼 힘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글쎄 갈비뼈 3대가 골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가워서 한 포옹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반가워서 한 행동이 이렇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네요. 물론 뼈가 약한 사람의 탓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대방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약한 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병원 신세를 지게 한 것이지요.

제대로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으로 배려하는 삶,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는 인천교구 평화의 날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미사의 성가를 신학생들이 맡아서 했지요. 그런데 영성체 후 특송 때 이상한 것입니다. 피아노 반주만 계속될 뿐 노래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저는 ‘신학생들이 왜 이래?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저런 실수를 한 거야?’하면서 그들이 실수를 했다고 마음속으로 판단했지요. 그 순간에 한 신부님이 성가대쪽을 바라보고 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학생들이 지금 영성체 모시고 있는데, 해설자가 미리 특송하라고 말해 버렸네.”

신학생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해설자의 실수였던 것이지요. 뒤쪽의 성가대석만 바라봐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을, 저는 보지도 않고 소리만 듣고는 신학생들이 실수를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를 알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해서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이러한 증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은 항상 주님의 일만을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을 알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아 똑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비로서 인생이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카를 쾨르너)



전쟁에 크게 패하는 요인(‘행복한 동행’ 중에서)

옛날 어느 장군이 전쟁에서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급한 전보를 받고 전쟁터에 나가고자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의 시종이 붙잡았다.

“장군님, 아직 말의 상태를 다 점검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단 1분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 그리고 평소에도 이 말은 아무 이상이 없고 건강했다. 오늘이라고 별 일 있겠느냐. 비켜라!”

하지만 불행히도 장군은 그날 전사하고 말았다. 그것도 적군과 맞서기도 전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실 장군이 타고 나갔단 그 말의 편자는 부서져 있었다. 편자가 부서지자 말은 발의 통증을 못 이겨 기우뚱거리다 그만 장군을 떨어뜨렸다. 장군의 죽음은 군사들의 자신감을 잃게 했으며 곧 전쟁에 크게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

말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모른다는 것, 또한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돌아올 큰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