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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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41223(화)-끊임없이 비움으로 인해 참 행복을...-빠다킹(조명연 마태오) 신부

두레골 2014. 12. 23. 08:57
2014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말라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복음 루카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행복에는 채우는 행복과 버리는 행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채우는 행복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던 것을 가지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직했을 때, 내가 원하는 지위나 명예를 얻었을 때 등등을 말합니다. 이런 채우는 행복은 세상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행복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85%이상이 아주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의 표정은 어떠할까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쁨이 영원했을까요? 아닙니다. 얼마 가지 못해서 가장 불행한 모습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원하는 채우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버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 행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한참 모자란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또 전혀 간직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넘쳐 보입니다. 수도생활을 하시는 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버리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지식도 학식도 명예도 돈도 권력도 채워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준을 모두 벗어나서 버리는 데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버리기가 힘들까요? 바로 세상의 기준이 너무나 유혹적이며,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할례식에서는 아기 이름을 짓는 명명식도 함께 거행되는데,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이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에는 아버지 이름을 땄기 때문에 당연히 ‘즈카르야’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 등장하는 이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말을 하지 못했던 즈카르야 역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동참합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세례자 요한이 내 핏줄이라는 표식이 되도록 자기의 이름을 따랐으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관습을 쫓아서 욕심을 부려 ‘즈카르야’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기준을 자기 안에서 모두 비워버립니다. 대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의심해서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자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채우라고 요구하는 세상의 법칙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비움으로 인해 참 행복을 얻으라는 주님께 내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분으로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치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유해도 모자라거늘, 어찌 검소한 사람의 가난하면서도 여유 있음만 할 수 있겠는가(채근담).



삶이란 디딤돌 뿐(‘행복한 동행’ 중에서)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산행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산행을 했다.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뒤따라오던 아들이 주저앉는 게 아닌가.

“그렇게 힘드니?”라고 묻자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상은 아직도 멀었단다. 거기까지 가려면 이런 고개를 서너 개는 더 넘어야 해.”하고는 아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는 다시 아들과 산행을 나섰다. 아들은 첫 번째 고개는 쉽게 넘었지만 두 번째 고개를 넘지 못하고, 또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하며 말했다. “정상은 멀었단다. 두세 고개는 더 넘어야지.”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산행은 계속되었고, 한 달 후 마침내 아들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걸림돌이 있었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면 디딤돌일 뿐이지?”

걸림돌이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걸림돌이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올라가게 하는 디딤돌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