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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20702(월)-세속의 기준에서 벗어나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2. 7. 2. 17:28
2012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모스 2,6-10.13-16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7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8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
9 그런데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인들을 없애 주었다. 그 아모리인들은 향백나무처럼 키가 크고 참나무처럼 강하였지만, 위로는 그 열매를, 아래로는 그 뿌리를 없애 주었다. 10 그리고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13 이제 나는 곡식 단으로 가득 차 짓눌리는 수레처럼 너희를 짓눌러 버리리라. 14 날랜 자도 달아날 길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며, 용사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5 활을 든 자도 버틸 수 없고, 발 빠른 자도 자신을 구하지 못하며, 말 탄 자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16 용사들 가운데 심장이 강한 자도 그날에는 알몸으로 도망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 마태오 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리면서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제가 오늘부터 3주 동안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총대리주교님 그리고 교구청 신부님들 몇 분과 함께 남미(파라과이, 페루)에 다녀오게 되었거든요. 아무튼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7월 22일 새벽에 다시 뵙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새벽 묵상 글을 올립니다.

한 어린 꼬마아이가 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습니다. 이 아이는 약을 발라 주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엄마! 넘어져도 안 다치게 땅이 푹신푹신한 스펀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로 그럴까요? 모든 땅이 푹신푹신한 스펀지라면 정말로 좋을까요? 하긴 잘 넘어지는 아이들에게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큰 일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푹신푹신한 도로면 차가 다닐 수 없을 것이며, 스펀지의 땅에서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앞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부족하고 나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만을 원하고 있으며, 특히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스펀지 같은 땅이 되고나면 얼마 뒤 곧바로 후회할 것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것들로 인해 나중에 주님 앞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세상의 것들과 함께 하는 따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순수하게 주님과 함께 하는 따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시지요.

한 율법 학자의 제자 하나가 예수님께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인간적인 판단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 모진 말씀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는 우리나라처럼 3일 장이나 5일 장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1년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시신이 부패하고 유골만 남겨 되는 1년 동안의 시간이 지나 납골함에 넣은 뒤에야 장례 절차가 완전히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지요. 3년 동안의 공생활만을 하신 예수님께 1년 동안의 시간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세속의 기준에서 벗어나 당장 주님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을 모두 갖춘 뒤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이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주님을 절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배려는 마음을 쓴다. 즉 타인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자애를 펼치는 것이다. 마음을 멀리 쓴 만큼 내 마음이 넓어진다(이케다 다이사쿠).



어제 석남동성당에서 성소후원회 모집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말을 쓰고 있나요?

전화통화를 했다 하면 3시간이 기본인 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매님이 평소와는 달리 30분 만에 전화를 끊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너무나도 의아하게 생각한 남편이 왜 그렇게 빨리 통화를 마쳤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아, 글쎄 잘못 걸려온 전화지 뭐에요.”

잘못 걸려온 전화도 30분 동안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능력이 아닐까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우리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쓸모없는 말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서 얼마나 쓸모 있는 말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쓸모없는 말만 앵무새처럼 계속해서 내뱉고 있는 나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의미 있는 말, 긍정적인 말, 사랑의 말, 결국 주님의 말을 하루 24시간 내내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우리가 될 때, 진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으니까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