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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포르치운쿨라에서 자신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려고 했던 동료들을 위해 썼던 회칙에서 프란치스코는 소유의 위험에 대해 분명히 경고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낡은 망토나 보잘것없는 식사를 가난한 사람 누구에게나 기꺼이 주고자 했던 이상으로 소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랑스럽게 불렀던 '가난 부인'에 대한 충성이었다. 가난은 그리스도의 기사인 그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했던 아가씨였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가난하신 예수님을 영예롭게 하고 본받는 방법으로서, 프란치스코가 변명의 여지없이 택한 철저한 가난은 여러 면에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포기하는 생활양식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프란치스코의 갈망을 추상적으로 감탄하면서도 가난의 이상을 지나치게 본다고 못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병적 극단주의라고 여기고 질려버린다. 그들은 하느님은 우리가 더럽고 집없는 거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우리 각자는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가난 부인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범주의 의견에 속하든 상관없이, 프란치스칸 가난 뒤에 있는 영성을 얼버무리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적어도 가난 부인은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 사회를 공격하고 있는 소비주의의 만성적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당신 자신의 생활과 양심을 점검해 보라.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 참으로 필요한 것은 얼마만큼인가? 소유한 것의 얼마 만큼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냥 쌓여진 물건들인가? 두 대나 세 대의 차, 세 대나 네대의 TV, 수백만 원씩 하는 오디오가 참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7여년마다 더 큰 집으로 이사가거나, 매년 여름마다 점점 더 이국적인 곳에서 휴가를 보낼 필요가 있는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재산들이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주지 않고 실제로 부담스러워지는 시점에 분명 다다르게 된다. 우리는 도난, 화재, 또는 경제적 몰락으로 재산을 잃을까 걱정한다. 우리는 이웃이나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더 나은' 재산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것과 비교한다. 우리는 더 많은 물건을 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자신을 죽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서 끝날까? 이것이 과연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인가? 이것이 자유와 기쁨으로 가는 길인가? 소비주의 정신의 더 해로운 영향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교환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일용품,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조종될 수 있는 '물건들의' 차지가 되어버린다. 구이도 주교에게 대답할 때 프란치스코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우리가 갈망하는 물질을 두고 맞선 경쟁자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원수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것이든, 인간의 본성인 하느님의 모습은 무시되고 만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 자신의 정신건강을,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훼손한다. 프란치스코가 가난부인을 받아들였다는 것에는 또 다른 핵심이 있다. 우리가 더 많이 축적할수록, 참으로 곤궁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이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범퍼 스티커는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단순하게 사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재치 있는 말장난이 아니다. 한 국가로서 미국은 세계의 연료공급량과 식량에 있어서 과도한 비율을 사용하고 그리고 자주 낭비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살아가기 힘든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은 외면하면서도, 편안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자발적인 가난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자유를 주는 선택이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은 언제나 그 곤궁한 희생자를 노예처럼 만들고 비참한 생활에 빠뜨린다.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보다 앞서 계셨던 예수님 두 분 모두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였다. 크리스천 길을 걷는다고 외치는 우리가 어찌 이보다 더 적게 할 수 있겠는가? - 프란치스칸 매일 묵상집 -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10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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