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곳은 도대체가 경제의 기본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다. 인건비가 적은 곳엔 물가가 싸거나 적어도 비슷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곳은 인건비는 다른 곳의 십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물가는 선진국보다 두세 배 정도 비싸니 도대체가 도깨비 시장이다. 이곳 주민들은 모든 것들이 원래 그렇게 비싼 것인 줄 알고 아예 포기해 버렸다. 양파나 감자는 부르주아 음식이라 살 생각도 하지 않고 요리법도 모른다. 양념이라는 것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유일한 양념은 소금과 식용유이다. 여기서 나는 수수에 소금과 식용유 조금을 부어 만든 음식이 매일의 주식이고, 유목민이라 가끔씩 먹을 수 있는 고기 요리도 채소는 무슨 채소, 소금과 식용유 조금 넣고 푹 끓이는 것이 유일한 요리법이다.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부화가 난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경제적으로도 버림받은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로 사정이 나쁜 것과 기후나 토질이 나빠 농작물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것이 주원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주원인은 이 두 가지 원인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이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는 것만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정당화되어 버린 무관심' 말이다. 어떠한 말이나 인권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자국의 이권이 없는 곳엔 등을 돌리고 마는 국제 사회의 무관심도 그렇고, '나 하나 또는 내 가족 하나 돌보기 빠듯한데.' 하는 개인적 무관심도 그렇다. 선의의 경쟁을 하나의 덕으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무관심' 은 하나의 덕으로 여겨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무관심' 은 엄연한 죄악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랑' 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등을 외치던 예수님께서 왜 부자들은 차갑게 외면하신 채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만 편애적인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셨을까? 그것은 아홉을 가진 부자에게는 하나만 주면 열이 되지만 하나를 가진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홉을 주어야 열이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예수님의 강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사랑의 교리가 아닌가 싶다. 혹시 현재 우리의 무관심은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첫 번째 직무유기일지도 모른다. - (의술로, 음악으로 사랑 나누는 선교 사제 쫄리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이태석 요한 신부님)/ 생활성서사 - 에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090621)
|
'◐ † 사랑과 믿음 ◑ > 오늘의 기도·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90621(일)-오늘의 묵상(믿음의 능력) (0) | 2009.06.21 |
|---|---|
| 090621(일)-하느님 찬미에의 초대 (성 프란치스코) (0) | 2009.06.21 |
| 090619(금)-아주 특별한 여행 (0) | 2009.06.19 |
| 090617(수)-하루 일을 시작하는 기도 (한상봉) (0) | 2009.06.17 |
| 090615(월)-오늘의 묵상(인내와 자선의 첫출발) (0) | 2009.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