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평화를...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헤쳐나가길 빌며...

행복한 쉼터, 두레골...

◐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50812(수)-일치와 화합 -빠다킹 신부

두레골 2015. 8. 12. 12:18
2015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신명 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복음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운전을 해서 어디를 가고 있는데 길이 너무 많이 막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곳의 도로는 무척 넓은 곳이어서 차량의 통행이 늘 원활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날은 천천히 가는 것도 아니라, 그냥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예 도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서 전방을 살펴봅니다. 저 역시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차에서 내렸습니다. 앞에 까지 다녀온 분이 꽤 큰 사고가 났다는 말을 전해주더군요.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대며 말합니다.

“왜 갑자기 사고가 난 거야? 바쁜데... 빨리 가야 하는데...”

자신들이 가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저는 조금 서늘해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이 사고로 인해 다친 사람이 없냐면서 안부를 묻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늦게 가게 됨에 대해서만 투덜거리며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고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이 다친 나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남들에게는 엄격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세상에는 남의 일이 없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을 꽝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고, 그 일이 또 언젠가는 나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에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람을 사랑을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이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옳지 못한 길로 가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난 대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곧 첫 번째는 혼자서, 두 번째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다음에는 훨씬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서 타이르라고 이르십니다.

이는 이 사람이 수치심을 느껴서 자신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엇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내 삶의 방향을 사람 자체에 두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받아들이는 사랑의 삶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들의 일치와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일치와 화합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신만의 짐을 지니고 살아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톨스토이).

 
도대체 성모상 같지 않아서 종교전쟁 때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성모상.


세 명의 도적

탈무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도적 세 명이 부잣집을 털었습니다. 그 집에 얼마나 금과 현금이 많은지 각각 큰 자루에 한 자루씩 짊어지고 자신들의 은신처로 와 보니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똑같이 나누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명이 제안을 하지요.

“우리 기분도 좋으니까 술 한 잔 기분 좋게 마시고 나누자.”

가장 나이 어린 도적이 술을 사러 내려간 사이, 두 명이 앉아서 이런 모의를 합니다.

“저 놈이 없어지면 우리는 더 많은 재물을 가질 수 있어.”

그래서 둘은 술을 사러 간 도적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 그런데 술을 사러 간 도적 역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둘만 없어지면 내가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잖아. 술에 독약을 타서 모두 죽이자.”

술을 사러 간 도적이 도착하자마자 둘은 살해합니다. 그리고 사가지고 온 술을 마시고 모두 다 죽고 말았답니다.

욕심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판단이 혹시 나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래된 라디오들. 쓸모없는 것들도 이렇게 모아놓으니 멋져요.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5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