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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강론과 신앙 이야기

121008(월)-강론대 앞에 설 때 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두레골 2012. 10. 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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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루카 10,25-37대축일-마태오 18장 1-5절


착한 사마리아인


그때에 25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31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25 - 37)


<강론대 앞에 설 때 마다>



   강론대 앞에 설 때 마다 온몸으로 느끼는 두려움이랄까 송구스러운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곤 합니다. 제 입으로는 갖은 좋은 예화나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정작 내가 그 메시지를 삶으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데서 오는 일종의 죄책감이겠지요.

   사랑이 지닌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 한 가지를 뽑으라면 아무래도 역동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사랑은 움직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동료 인간들을 향해 활기차게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냉담하다면 그 사랑은 철저하게도 거짓 사랑이 분명합니다.

   율법교사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서 목청 높여 외쳤지만,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의 사랑도 철저하게 허황된 사랑, 입술로만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의 성전에서 전례봉사를 업으로 삼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열심히 전례봉사에 전념했습니다. 막 끝낸 거룩한 예식과 사랑으로 가득 찬 감동적인 말씀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직면한 한 동료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만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한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사랑, 결국 거짓 사랑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톨릭교회를 칭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요 공존입니다. 가톨릭은 예로부터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이나 교육사업, 사회참여 등을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명의 행인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은 가장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난 사람을 향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정말이지 꼼꼼하고도 친절하게 치료하고 보살피고 헤아립니다. 치료뿐만 아니라 호송, 입원, AS까지 최상급 케어를 하고 있습니다. 강도 당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장 멀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반쯤 죽은 가련한 인류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 기구했던 나머지 천상에서 지상까지 먼 길을 오셔서 인류를 굽어보셨습니다. 갖은 결핍과 병고와 죄로 생겨난 우리의 상처에 치유의 포도주를 부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영혼의 여관인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당신의 죽음과 피로 우리의 죗값과 천국 가는 여행비를 치루십니다.

   오늘 우리도 율법 교사처럼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의 신비가 담겨져 있는 성경을 펼쳐야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치가 매번 벌어지는 교회의 성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과 성사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굿뉴스 가톨릭게시판 우리들의 묵상'에서 옮김 (1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