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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500 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모든 개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책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책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 논제는 지극히 평범하다.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살펴보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행복임을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늘어놓는 철학자는 별 필요가 없다. 분명치 않은 것은 '어떻게'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대답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광고업체는 참된 행복이 이 제품 또는 저 제품을 사는데 있다고 현혹하며 해마다 수십 억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 대중적인 심리학자들은 행복은 근원적인 자아와 교류하는데, 최고(Number one) 를 추구하는데, 또는 친밀해지는 법을 배우는데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어느 심리학자의 글을 읽느냐에 달려 있다. 대중 영화나 소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성관계를 많이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슬며시 암시하고 있다. 또 돈, 권력, 명성, 사회적 영향력도 필요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여러 거짓예언자들은 이것들이 행복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확실한 열쇠라고 끈질기게 권유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어떻게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알고 있었듯이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우리가 너무나 행복과 쾌락을 혼동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분명히 이 두 가지는 연관성은 있지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쾌락은 전형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또한 간헐적인 경향이 있다. 더구나 직접적인 쾌감은 기분 좋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의 안녕에 해가 될 수도 있다. 담배의 쾌감은 해로운 쾌락의 분명한 실례이다. 이와 반대로 행복은 외부 자극에 대한 일시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좀 더 지속적으로 머무는 내면의 상태이다. 행복은 때때로 '기분 좋을 '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쾌락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견디어내면서도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참된 행복은 쾌락처럼 기만하지 않는다. 행복은 실현해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때 나오는 결과이므로 결코 해롭지 않다. 사람이 완전한 의미 그대로의 '인간' 이 된다면, 그러한 행복을 이룬 것이다. 만일 쾌락과 행복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나는 그가 옳다고 본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쾌락에 만족함으로써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경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많은 쾌락들, 어쩌면 대부분의 쾌락들은 악의가 없다. 그러나 수천 가지 쾌락을 합친다 해도 쾌락은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행복이 우리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만큼 손을 높이 뻗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완전한 기쁨을 찾아서/ 케리 월터즈/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 - 에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천진암 기도항아리에서 온유님 올리신 글 옮김 (10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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