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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과 믿음 ◑/오늘의 기도·묵상

211004(월)-오늘의 묵상(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두레골 2021. 10. 4. 07:24

복복음 루카 10,25-37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오늘은 ‘사마리아인’이 아닌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또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의 의도가 몹시 불순합니다. 아울러 그의 질문은 매우 형식적이며 기계적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이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나는 그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라는 교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화법으로 접근하십니다. “누가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에게는 ‘아무개’라는 이웃의 이름이 중요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 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하느님의 가르침, 곧 율법은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니, 율법의 계명에 관한 지적인 앎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계명을 바탕으로 ‘무엇’과 ‘누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계명을 통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의 계명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읽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율법 교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 매일미사에서 옮김 (2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