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묵시 15,1-4 나 요한은 1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2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3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4 주님,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입니까? 정녕 주님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복음 루카 21,12-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언젠가 전철을 이용했을 때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서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었지요. 전철 안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 역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주 큰 목소리가 들립니다. 조용한 전철 안에서 울려 퍼지는 주위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 소리에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년으로 보이는 자매님을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이분께서 휴대전화에 대고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떻게 그 친구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니?”
‘당신이나 전철 안의 사람들을 배려 좀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배려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은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배려하지 못함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어르신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좀 조용히 갑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님께서는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셨습니다. 어르신은 다시 힘주어서 “조용히 좀 갑시다.”라고 크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러자 이 자매님께서 하시는 말씀.
“제가 언제 시끄럽게 말했다고 그래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고, 남의 문제점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면서 화를 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준이 되어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배려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은 훨씬 더 함께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들을 늘 배려해주십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면서 배려하시고,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배려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박해의 위협을 당해도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대신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인내’이지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라서 인내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배려하지 않고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손해 보는 것이 싫다면서 사랑하는 것을 멈춰버리는 것 등이 인내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배려하고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이러한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과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배려가 시작된다. 세상은 배려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발전해왔다(이어령).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신 갑곶성지의 순교자들. 그냥 좋은 것(최천호) 좋은 음악이란 내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이다. 때론 신이 나고 때론 눈물 나게 순간 그 기분에 따라 다가오는 것이다.
좋은 글이란 온갖 언어 동원하여 포장한 글이 아니라 읽는 순간 가슴 떨리게 공감되는 글이다.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나와 잘 맞는 사람이다. 생각도 대화도 마음도 잘 맞는 사람이다. 그걸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지 않는가?
좋은 집이란 대궐 같은 집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피곤한 몸과 맘 편히 쉬게 편안한 공간이다.
이렇듯 좋은 것이란 내 상황과 기분과 마음에 따라 때론 크게 다가오거나 시시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글을 보면서 예전에 어떤 신부님과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제게 어떤 노래를 들려주면서 “너무 좋지 않니?”라고 묻습니다. 문제는 저에게 그 노래가 별로라는 것이지요. 시끄럽기만 하고, 도대체 가사 내용도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좋은 노래일까요? 나쁜 노래일까요?
그런 기준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남의 기분과 상황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성당에서 본 독특한 성모상.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옮김 (161123)
|
|